기쿠요마치를 포함해 시라카와 중류지역에서는 긴 세월동안 강물을 끌어오지 못해 논밭을 만들기 힘들었습니다. 1588년에 구마모토 번주로 임명된 기요마사는 아소외륜산을 넘는 이중고개에서 내려다 본 벌판을 내려보고, 이곳에 논밭으로 바꾸어 사람들의 생활을 안정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성 축조의 명인 기요마사는 토목과 치수(治水)공사의 명인이기도 했습니다. 독자적인 발상과 높은 기술력을 발휘해 시라카와의
물을 끌어들여 논밭으로 보내는 몇몇 용수로와 보를 만들기를 시작했습니다.
오즈마치의 세타(瀬田)에서 시라카와의 물을 끌어들여 시라카와 우측 강변을 적시는 “우와이데”, “시모이데”만들기를 시작해 가토가문 이후 구마모토 번주가 된 호소카와 시대에 완성해 오즈마치, 기쿠요마치 일대를 곡창지역으로 바꿨습니다. 때를 같이해 시라카와 좌측 강변에도 물을 공급하기 위해 “바바쿠스노이데”가 만들어졌습니다. 이러한 용수로는 훌륭한 기술과 지혜, 여러 연구로 만들어져 400년 이상이 지난 지금까지도 현역 용수로로써 이용되고 있습니다. 기요마사가 만들게 한 토목유산 중에서도 걸작이라 평가할 만 합니다.
용수로의 공사는 긴 세월에 걸친 아주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단단한 암반을 20미터나 파 들어가 터널 형태로 구멍을 뚫는 “하나구리이데”작업은 가장 어려운 공사. 기술도 운반용 트럭도 없던 에도시대에 모든 공사는 수작업. 끌과 곡괭이로 파내고, 삼태기 일종의 도구로 퍼낸 돌과 흙을 밖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기요마사는 스스로 선두에 서 농민들의 사기를 고무시켰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토목공사는 지역 농민들이 대가없이 일하던 것을 당연하게 여겼지만, 기요마사는 공사에 참여한 농민들에게 쌀을 나눠주고, 무리하지 않고 일할 수 있도록 작업방법이나 합의과정을 진행했습니다. 영주와 서민이 마음을 하나로 모아 큰 꿈을 위해 합의한 덕분에 이 어려운 공사를 이겨내며 하나구리이데를 완성한 것입니다.